저번주 토요일, 나는 짝꿍이의 자취방에 갔었는데 그곳에서 내가 키우는 앵무새인 '하늘이'를 데리고 잠시 나왔다가 요녀석이 갑자기 푸드드덕 날라가서 어디로 갔는지 모르게 되었었다. 나는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고, 두시간 쯤 찾다가 맨바닥에 주저앉아 울기도 하였다. 특히 짝꿍이는 알바중이라 혼자 그 상황을 감당해야 하는게 딱히 무슨 이유는 없지만 짝꿍이가 너무 밉고 그랬다. 그러다 결국 세시간 째에 사람들을 수소문하고 계속 돌아다니다가 나무 위에 있는 하늘이를 발견하였고, 약 삼십분간의 대치 끝에 하늘이를 내려오게 하는데에 성공했다.
하늘이를 찾을때의 이야기이다. 나는 짝꿍이의 자취방이 내가 다녔던 전적대 부근이어서 그 거리를 수도없이 걷기도 하고 차로 지나가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하늘이의 크기가 그렇게 크지도 않을 뿐더러 심지어 초록색(!!)이어서 모든 부분을 구석구석 꼼꼼히 봐야만 했다. 몰래 편의점 옆에 달린 사다리로 올라가 위에서 바라보기도 해야했고(에어컨 실외기 사이에 껴있을까봐) 사람이 다니는 길이 아니라 담장을 넘어서 가야 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늘 다녔던 그 길의 새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하늘이를 찾지 못했다면 그 감각은.... 매우매우 절망적이고 다신 경험하고 싶지 않은 감각이었겠지만 찾은 지금의 시점에서 바라본다면 그곳에 쓰레기통이 있었는지, 그 옆 구멍은 물 배수구가 있었고, 그 옆은 사다리가 있고(꽤 튼튼한), 어떤 담장 밑에는 죽어있는 고양이가 있었기도 했고, 실외기의 배열이 어쩌면 조금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했고 등등.
얼마 전에 유튜브에서 우연히 '빨간 차 이론'이라는 것을 보게 되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는 일상에서 너무 놓치는 것이 많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다니면서 수많은 빨간 차를 보지만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듯이. 굳이 예술가의 역할 중 하나를 꼽자면 우리가 일상에서 놓치고 지나쳐버리는 그런 감각을 발견해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하늘이를 잃어버리고 나서 내가 늘 다니던 거리를 다시 한번 유심히 봤듯이.
나는 김호남교수님이 첫 수업때 하셨던 "같은 가치를 향유하는 어떠한 집단이 있고, ~~~" 는 말씀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내가 만든 작품 중 나의 세계관에는 '우쥬'라는 개념이 있다. 학창시절과 더불어 어른이 되어서도 어디든 잘 어울리지 못하고 성공하지 못하는 나는 모두가 날개가 달려 날 수 있는 지구에서 유일하게 날지 못하는 '날개가 부러진 소년' 이었다. 그러나 '우쥬'라는 더 넓은 공간. 즉, 예술계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 곳에서는 날개가 없어도 무한히 유영하고 난다는 이야기를 담았다. 그리고 그런 나를 '우쥬인간'이라고 지칭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호남교수님의 말씀은 나에게 마치 나의 우쥬를 인정받고 더 나아가 다른 우쥬인간들이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로도 들렸다.
남들이 쉽게 감각하지 못하는 감각들이 한번에 몰려와 나를 괴롭힐 때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생각들을 배출하며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지는 꽤 되었다.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갈 차례이다. 단순히 배출(배설)을 넘어 (언어)메시지를 없애고, (비언어적 감각)매체를 남겨보자. 감상의 공간을 남기고 자유로워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