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파동 치며 울렸다. 미동도 없이 잔잔히 고여있는 액체는 위아래로 흔들리며 그 울림을 온 호수에 퍼뜨렸다. 그 위에 동동 떠다니는 나뭇잎과 잔잔히 풍기는 비릿한 소금쟁이 냄새. 이따금 찾아오는 뜨거운 죽음의 열기들. 버터의 녹는 지점이 다다랐다. 느끼하고 고소한 향기가 방 안에 가득 찬다. 손을 올리고 허리를 숙이며 엉덩이를 내밀곤 그 뜨거운 열기에 몸을 맡긴다. 보글보글 올라오는 간신히 남겨놓은 숨망울들, 차마 버리지 못했던 미련들. 잊어버리고 말았던 구린 얼룩들. 나무는 살랑살랑 웃는다. 태양은 찌릿하게 찌른다. 매미는 치이이 하고 울었다. 나는 액체 속에 있었다.
버터를 굽고 그 위에 핏기를 잘 빼둔 스테이크를 올렸다. 치이익 익어가는 소리에 핏물이 올라오기만을 기다리다가 결국 그 고기를 뒤집어 다시 익히기 시작했다. 가위로 그 고기를 예쁘게 잘라 접시에 담고는 냉장고에서 아까 꺼내둔 메쉬포테이토를 올려 고기에 잘 발라 한입에 집어넣었다. 이어서 잘 얼린 얼음을 잔에 담아 위스키를 조금 담고 물을 가득 담아 입에 들이부었다. 딱히 무슨 맛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그 행위를 몇번 반복하다 보니 이내 익숙해져서 접시를 비우곤 적당히 물이 받친 싱크대에 던져두었다. 접시가 들어간 물은 파동 치며 울렸다.
[여름]
그 아이가 나를 찾아온 것은 그 뒤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초여름, 장마가 시작되기 전 점차 습해지고 몸에 그 무엇이던 달라붙기 시작하는 지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밖에서 시끄러운 엠뷸런스 소리가 앵앵 내 창문을 뚫고 비집어 내 공간을 채우던 그날 그때 그 아이도 내 집을 비집어 들어왔다. 아무도 올 일 없었던 내 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열었던 거울에 비친 내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짜증에 섞인 내 행동에 그 아이는 미안하다는 듯 무릎을 꿇고 자신의 두손과 발을 바닥에 문지르며 고개를 숙이고 오른쪽 손 그중에서도 검지를 벌벌 떨었다.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그 아이는 내게 무엇인가를 빌고 있었고, 나는 이 아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 줄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정확히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가 그냥 죽으라는 의미로 문을 쾅하고 닫았다. 그리고 일주일 뒤 그 아이는 정말로 죽었다. 사인은 익사였다.
[겨울]
지난 겨울 크리스마스이브, 나는 사람들이 북적이는 홍대 한복판에 홀로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 뒤에 열심히 반짝이는 무지개 전광판들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손과 손이 맞닿아 걸어가는 사람들은 가만히 서있는 나를 제대로 응시하지 못한 채 부딪히며 지나가기 일쑤였다. 치고 치이는 와중에도 나는 전광판에서 눈을 떼지 않았고 그 전광판들의 패턴이나 움직임을 분석하며 그것들을 내 노트에 열심히 기록하고 있었다. 물결치는 모양, 흘러가는 모양. 혹은 도무지 패턴을 알 수 없는 움직임을 보이는 각자의 전광판들. 점차 눈에 남아 가는 잔상들과 함께 내 눈동자도, 그 앞에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일렁이기 시작했다. 나는 내 노트를 덮고는 일렁이는 사람들의 파도를 지나 맥주를 사들고는 시린 손을 붙잡고 한강에서 맥주를 후후 불어먹었던 걸로 기억한다. 한강은 다행히도 아직 얼지 않아 미묘하게 물결치고 있었고, 나는 그 광경을 보고 전광판으로 물결을 만들고 싶어졌다. 분명히 그 물결은 분명히 어딘가 전광판과 맞닿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 보였지만 그땐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그냥,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본격적으로 그 작업에 몰두하려 했지만 왜인지 자꾸만 어디선가 작업에 대한 의문이 들기 마련이었고 늘 그럴 때마다 기획이 뒤집어져 제대로 제작에 들어갈 수 없는 상태가 반복되었다. 물과 전광판. 그리고 파동. 세 가지 단어와 물성은 서로 융합할 듯하면서도 멀어지는 관계임이 분명했다. 마치 땅, 위에 물. 그리고 그 위에 흘러가는 무엇과 같이 셋은 서로 붙어있기도 하면서도 떨어져 있는 관계같이 느껴졌다.
[봄]
이런 저런 생각을 더하다 보니 어느새 봄이 되어 내 작업실을 밝혔고, 나는 그제야 밖으로 나와 사람들이 대부분 자신들의 일을 하러 거리보다는 집이나 회사에 들어갔음을 실감했다. 다소 잠잠해진 사람들의 파도를 지나 조금은 어두워진 전광판들도 지나고 다시 한강에 들러 맥주를 깠다. 확실히 봄이 찾아와서인지 강해진 햇빛이 저번보단 더 강하게 흔들리는 물빛에 반사되어 무분별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 빛에는 어떠한 패턴도, 의미도, 규칙도 없었다. 근 한 달간 패턴과 규칙. 그리고 무엇보다 의의를 찾으려고 애쓰던 나에게 그것은 위로가 되기엔 충분했다. "물의 파동은 규칙이 없다. 무분별하다. 예측할 수 없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급하게 노트를 꺼내 똑같이 적기 시작했다. '물의 파동은 규칙이... 없다... 무분별.. 하다.. 예측할 수 없다... 그래서... 아름답다..'
[가을]
"푸하하! 그러니까, 그땐 정말로 네가 죽는 줄만 알았어. 정말로. 진짜로." 그 아이는 내게 과장되게 웃어보이며 한 손에는 하이볼을 들고 나에게 들이대고 있었다. 나는 이미 다 식어버린 일본식 돈가스와 콘샐러드 옆에 간신히 기대고 있는 방울토마토를 쿡쿡 찔러보다가 이미 충분히 부른 배를 직감하고는 수저를 내려놓았다, "뭐야, 더 안 먹어? 오늘은 내가 쏜다니까?" "아니, 됐어. 그보다 그런 거 아니니까 이제 그만 가도 되지?" "뭐야 너 지금~? 오히려 연구실 들어가자마자 감전될 뻔한 사람 구한 건 난데 고맙기는커녕!" 나는 연구실에서 연구 중이던 전광판 때문에 감전될 뻔했고, 그걸 그 아이가 발견해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됐고, 일단 오늘은 두 번째 생명을 얻은 기념으로 마셔. 짠!" 엉거주춤 들어버린 잔에 부딪힌 액체는 무분별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 무분별한 파도에 잠식당하고 싶진 않았다. 다시 잠식당하면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지금이 좋으면서도 지금이 싫었다. 자꾸만 다가오는 그 아이가 싫었다. 자꾸 나를 잠식하려 들고 점차 잠식되어 가는 나 또한 싫었다. 그 아이와의 만남은 최소화해야만 했다. 그래서 무차별적으로 그 아이를 피했다. 만나도 피하고, 인사해도 피했다. 눈동자를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 아이도 그걸 눈치챘는지 점차 나와 멀어지기 시작했다.
[겨울]
나는 내 전광판에 파동이라는 형태를 추가하고 싶어졌다. 결코 그 아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 아이를 기리고 싶은 마음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렇기에 그 형태에 관한 연구가 필요했다. 나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혼자 거리를 누볐다.
[가을]
드디어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 무분별하게 꽂아놓은 신호 제어기에 전광판은 물에 담궜다. 그리고 물은 랜덤 하게 출렁거리게 만들었다. 물 밖에서 바라보면 무분별하게 반짝이는 인공 윤슬을 관람할 수 있었다.
그 아이는 나를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충분히 괴짜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다만, 나는 그 아이의 무분별한 친절이 오히려 폭력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어쩌면 사랑받기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물의 파동은,, 불규칙 하다.... 예측할,, 수 없다... 그래서.........아름 답. 다..'
'물의
-- - .. --. -. --.. -- ..- .. -- .- ... --
파동은
--.---..-.. -. ........- -.- - .-- -- - .-
예측-.--..--. 할 수 없.--..---다
그래--.-서--.-.-
아름...-..-답...--다--.-.-'
나는, 잠식당하기 싫었는데. 아무래도 잠식당해 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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