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턴트 사랑은 싫다

comp - 미녁 - 인스턴트 사랑은 싫다 달콤하고 맛있다고 느껴져 끌릴 지 모르지만 지나고 보면 결국은 후회하고 마는 걸요 feat. Can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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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끝에 당신이 서 있을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건 제 단순한 착각이었나 봐요. 어렵사리 찾아온 당신의 앞 왼손 약지엔 이미 다른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반지가 반짝거리고 있었거든요. 3년 전, 시애틀에서 우연히 만난 당신이 정말로 저를 찾아올 거라고. 나를 찾아와서 결혼을 요청할 거라고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는데. 3년을. 1096일을. 26304시간을. 하나하나 마음에 새겨가며 기다리고만 있었는데. 그 반지는 뭔가요? 너무 아름답잖아요. 당신을 기다린 제 세월보다 아름다워 보이는걸요. 어떤 사람일까요? 어떤 옷차림을 하고,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성격을 가졌길래 제 보답받지 못하는 3년보다 아름다운 당신을 빼앗아갈 수 있는 걸까요. 저는, 저는. 너무 처량해지는 걸 당신은 알고 저를 찾아온 건가요. 차라리 저를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저는 당신을 기다리는 이 아름다움을 조금이나마 더 간직하다가 결국은 아름다움 그대로 당신에 대한 사랑을 잊어버릴 수도 있었던 건데. 왜 저를 찾아왔나요. 저를 불행하게 만들고 싶으셨나요. 아쉽지만 그러진 않을 거예요.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 당신 없이 스스로 홀로 서는 법을 배워버렸거든요. 그래도.. 그렇지만. 가슴 안에 있는 당신을 형상화 한 내 작은 검정 초콜릿 쿠키 조각이 금이 간 느낌이에요. 방치되어서 있는 줄도 까먹었던 적도 솔직히 있지만 이제야 그 쿠키가 부서져 내리기 시작해 달콤한 향기가 제 온 마음속에 퍼지고 있는 걸요. 그래, 이렇게 달콤했었지. 그래, 이런 향기가 났었구나. 하고 말이에요. 이 쿠키... 저에게 있어서 세 번 정도 나눠 먹어야 할 것 같아요. 그럼, 먹어볼까요.
 
첫 번째 바사삭,
우연찮게 찾아갔던 시애틀의 그 멋진 박물관 앞 포차로 이루어진 스타벅스에서 우리는 종이로 된 빨대를 서로 주워주며 만났어요. 저는 종이로 된 빨대는 구멍이 하나라고, 왜냐하면 구멍이 하나로 이루어져 길게 이어진 형태로 구멍은 하나로 봐야 한다고. 그 구멍을 두 개로 치게 된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3차원적인 구멍은 구멍이 두 개로 이루어진 거라고, 혹은 그 이상 다수의 구멍들이 무수히 이어져 n개의 구멍이 이어져 있는 거라고 시답잖은 이야기를 했었죠. 그리고 당신은 그런 제 모습을 보고는 피식, 하고 웃으며 맞다고. 그렇지만 보라며 당신은 사선으로 이어져있는 종이 빨대를 익숙한 듯이 주르륵 투둑 하고 풀어버렸어요. 길게 늘어진 하얀 종이 쪼가리가 된 종이 빨대를 보고는 당신은 이제 구멍이 몇 개냐고 저에게 통명스럽게 말했죠. 
 
두 번째 바사삭,
저는 당신을 잃어버린 줄만 알았어요. 사라진 빨대의 구멍처럼 하나 또는 무한히 존재할 수도 있었던 당신이 그저 아무것도 아닌 사선으로 풀린 긴 직사각형의 종이쪼가리가 된 것만 같았어요. 실은 사랑하고 싶었지만 그런 당신을 사랑할 수도 없었어요. 저는 당신을 다시 말기 시작했어요. 머릿속에서 돌돌 말아 뭉쳐보기도 하고 길게 나열해보기도 하고. 생각을 말기도 하고. 당신이라는 구멍을 만들기 위해 애썼어요. 그리고 전 어느 순간 당신에 대한 구멍을 만드는데 성공했고 당신은 하나 혹은 무한히 제 속에서 존재하게 되었어요. 영원히, 뱅글뱅글 돌면서. 그 구멍 속으로.
 
세 번째 바사삭,
저는 구멍을 통해 당신을 하나 혹은 무한히 만들어냈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제 착각이었던 것 같아요. 당신이라는 구멍, 즉 하나도 아니었던 스타벅스 빨대 직사각형 모양의 종이에 불과했던 당신은 구멍이 되어 제 온 마음을 집어삼키기 시작했어요. 하나였던 구멍은 무한히 존재하게 되어서 제 모든 마음과 생각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한 거예요. 아니, 어쩌면 제가 그 구멍 속에 제 모든 진심들을 쏟아부었을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확실한 건 당신은 결코 제 마음의 구멍이 되었다는 거예요. 뱅글뱅글, 또르르.
 
가루를 털어 먹으며,
저는 그저 당신과 행복하고 싶었어요. 당신이라는 제 마음 속 구멍 속에 제 사랑과 진심을 꾹 꾹 눌러 담고 싶었고요. 그런 제 마음들을 바라보면서 당신 속에 있는 저를 보고 흐뭇해하고 싶었어요. 비로소 당신 속에 제가 존재한다는 걸 깨닫고 싶었고요. 믿음을 신뢰로, 신뢰를 안정으로, 안정을 사랑으로 바꾸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이렇게 됐다는 건 이미 돌이켜봤자 소용없는 일이라는 건 알고 있고요. 제가 비참하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아직도 미련하게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저는..
 
당신이라는 시애틀 앞에서 받아온 그 종이 빨대를 이젠 조금씩 풀어볼게요.
 
투둑,
 

 
투두둑
 
주르륵